거제도 포로수용소에는 어느 구역에나 반공포로와 친공포로가 혼합 수용되어 있었다. 개인별로 반공과 친공의 성분이 뚜렷하게 구별되지 않은데다가 수용소를 관리하는 미군 당국이 이 문제에 관심을 두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다른 전쟁에서는 사상문제때문에 포로가 이처럼 극단적인 자체 분열을 일으킨 사례가 없었다. 또한 포로 관리 책임을 맡은 미군 당국은 제네바협약에 따라 그들을 잘 억류해두었다가 전쟁이 끝날 때 송환하면 그뿐이라는 생각에서 적당하게 수용하기만 하면 될 것이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수용소내에서는 서서히 편갈림이 생기고 친공과 반공간의 대립이 시작되었다.
사실 처음에는 그렇게 했어도 별로 문제가 되지 않았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면서 차츰 친공과 반공세력이 구분되기 시작하였고, 서로 간에 대립이 발생하면서 충돌도 가시화되기 시작했다. 그런데 유엔군이 전쟁 중에 붙잡아 수용소에 억류해 둔 포로는 당연히 친공으로 분류되어야 마땅할 것이었다. 북한군과 중공군 중에서 반공포로, 바꾸어 말하면 유엔군측에 우호적인 "친자유주의 (親自由主義)" 포로가 나타나게 된 것은 상상밖의 일이었다. 그런데 예상외로 이런 성격의 포로들이 북한군과 중공군에 공통적으로 나타났을 뿐만 아니라, 그 숫자가 오히려 친공포로보다 더 많았다.
중공군에서는 본래 장개석 군대에 있던 군인들이 공산측을 기피하여 반공의 편에 서게 된 경우가 많았다. 그리고 한국인 포로 중에는 원래 남한 사람들이 북한군에 강제 편입되었다가 포로가 된 경우도 있었다. 하지만 일단 공산군으로서 유엔군에 적대적인 행동을 하던 그들이 포로가 된 후에 공산주의를 극력 혐오하고 본국으로의 귀환을 결사 반대한다는 사실은 놀라운 일일 수밖에 없었다.또 이들 반공포로 중에서도 더욱 열렬한 반공주의자들은 남한 출신보다 북한 또는 중국에서 공산 지배를 경험해 본 사람들이 대부분이었다는 사실은 의미하는 바가 컸다.
공산치하에서 살아보았던 그들이 철저한 반공정신으로 무장되어 있었으며, 포로수용소에서 친공포로들과 싸우는 선두에 섰던 핵심요원이 되었던 것이다. 친공포로와 반공포로들 사이에 서서히 편갈림이 생기고 양자간에 대립이 발생하기 시작한 시기는 포로들이 부산에서 거제도로 이동하고 나서부터였다. 이와 같은 현상은 점점 뚜렷해져서 수용소 내에서는 양측의 투쟁이 시간이 지날수록 가열되었고, 구실과 기회만 있으면 습격과 난투극을 벌이게 되었다.
이런 과정을 겪으면서 초창기에는 성격이 뚜렷하지 않았던 수용소의 각 구역이 친공 또는 반공으로 구분되는 현상이 나타나기 시작하였다. 그리고 겉으로 드러나지 않는 양측간의 암투가 서서히 싹터서 주도권 싸움으로 되고, 어느 편이 주도권을 잡느냐에 따라서 좌익 또는 우익 수용소라는 간판없는 이름이 붙게 되었던 것이었다. 즉, 어느 수용소에서 친공세력이 통제권을 장악하면 그 수용소는 친공구역이 되고, 반공세력이 그 수용소를 장악하게 되면 반공구역의 성격을 띠게 되는 것이었다.
그렇긴 해도 처음에는 친공·반공계 간의 충돌이 주먹 또는 몽둥이나 천막 지주와 같은 것으로 치고 때리는 정도의 충돌이었다. 그러나 시간이 경과하면서 싸움은 가열되었으며, 친공계는 더욱 악랄한 방법을 동원했다.
이런 과정에서 이처럼 반공이나 친공으로 확연히 구별되는 곳이 있는가 하면 그렇지 않고 불안한 평형, 또는 불안한 우세를 유지 하는 구역도 있었다. 이런 경우에는 언제 그 상태가 깨어질런지, 또는 그 우세가 뒤집어질런지 알 수 없었다. 마치 휴화산 아래의 마을처럼 언제나 긴장감이 감돌고 있었다. 반공과 친공은 공존할 수 없었으므로 주도권을 장악하기 위한 모의와 투쟁이 늘 계속되었다. 그런데 휴전회담에서 포로 교환 문제로 쌍방간에 논란이 벌어지게 되자 우익계인 반공포로들은 입장이 난처하게 되었다. 왜냐하면 휴전 성립 후에는 본의 아니게 북한이나 중공으로 돌아가야 할지도 모를 운명에 처하였기 때문이었다.
반공계 포로들이 이렇게 곤란한 처지에 있었던데 반해 친공계 포로들은 '해방동맹'과 같은 조직을 통해 포로들을 규합·통제하고 점점 그 힘을 키우면서 수용소 내에서 반공계 포로들을 압도하려고 하였다.이들은 휴전회담의 진행과 더불어 가공할 만한 계획을 세웠다.
그들이 만든 계획은 단계별로
사전의 은밀한 조사를 통해 반공포로들을 파악한 다음 일시에 이들 전원을 살해한 후 전체 포로들이 폭동을 일으켜 수용소를 탈출한다.
특별공작대가 수용소에서 쓰는 발전소를 파괴하고 암흑화된 기회를 틈타서 미군 무기고를 습격, 각종 무기를 탈취하여 한ㆍ미 경비대와 교전, 이를 격파하고 거제도를 완전 장악한다.
육지에 상륙작전을 감행하여 지리산 유격대와 합류한다는 것이었다.
대한반공 청년단 단증 수용소내의 피비린내 나는 살육전에서 열세에 있던 반공포로들은 적색포로들과 대항하기 위해 자발적으로 대한반공청년단을 조직하였으며 그들끼리의 신분 확인을 위해 비밀리에 단증과 뱃지를 만들었다. 이 단증은 광목조각에다 물감으로 일일이 그린 것으로 선명한 태극기와 한반도가 그들의 마음을 대변하고 있다.
이와 같은 폭동 계획을 실천하려고 그들은 죽창 등의 각종 살상무기, 깡통에 휘발유를 이용하여 만든 수류탄 등을 준비했다. 물론 이들의 계획이 무모, 무지하다 하더라도 이러한 계획을 탐지하게 된 반공포로들로서는 공포를 느끼지 않을 수 없었다.
반공포로들로서는 휴전회담에서 공산군측이 주장하는 강제송환 문제보다도 이제는 수용소 내에서 친공포로들에게 맞아 죽느냐 아니면 사느냐 하는 문제가 더 급하게 되었다. 그리하여 반공포로들은 결사 투쟁으로 친공포로들과 대항하기 위해 1951년 8월 7일 [대한반공청년단]을 조직하기에 이르렀다.
이 반공청년단의 투쟁목표는
단의 기본 동지를 중심으로 동지 획득에 주력한다.
유엔군 당국에 대해 인권 주장 및 제네바협약에 의한 권리 주장 운동을 전개한다.
수용소 내 친공포로 적발 운동에 나서서 수용소 당국에 협력한다.
공정한 포로 심사를 위한 각종 공작을 전개한다.
삐라 살포, 반공가 합창, 구호 제창, 테러전을 강력히 전개하여 친공포로를 분쇄한다.는 것이었다.
대한반공청년단의 조직과 편성으로는 본부에 단장, 부단장, 비서장외에 11개부와 직속 경비대를 두었다. 그리고 이상과 같은 본부 조직 외에 각 '구역'을 '대대'로하여 대대에는 조장, 부조장, 중대에는 분조장, 소대에는 반장의 간부들이 배치되어 1개 구역당 약 6,000명의 인원을 통솔하도록 하였다. 반공포로의 조직은 자연발생적인 것으로 그 조직력은 친공포로에 미치지 못하였으나, 유엔군 특히 한국군 경비대의 후원 및 지원을 받는다는 장점이 있었다. 반면에 친공포로의 조직은 이 분야의 전문가가 철저한 계획하에 만든 것으로서 북한의 지령과 자금 지원을 받는다는 강점이 있었다.
방공포로의 학살사건
방공포로의 학살사건
소위 인민재판을 한 후 즉석에서 타살된 반공포로들
1951년 8월 말까지 거제도와 부산에서는 포로들 간에도 대립이 첨예화되었다. 특히 거제도는 친공포로들의 폭력 행사로 더욱 살벌해지고 있었다. 양쪽은 수용소의 각 구역 내에서 자기 편의 인원을 더 많이 확보하기 위해 극단적인 방법을 사용했다. 폭력이 횡행했으며 특히 친공계열이 우세한 곳에서는 매일 인민재판이 열렸다. 비록 반공주의자들이 다수인 경우에도 친공포로들이 주도권을 장악하는 경우가 많았다. 왜냐하면 핵심 공산주의자들은 조직이 잘 되고 계획된 방법을 적용하는 데 있어서 전문가들이었기 때문이다.
친공포로들이 주도한 반공포로 학살의 대표적인 사건은 1951년 9월 17일에 일어난 일이다. 이날 밤 제77수용소에 있던 해방동맹 본부에서는 비밀리에 대원들을 모아놓고, "북한 공산군과 중공군이 대공세를 취하여 부산이 벌써 북한 공산군 수중에 들어 왔으며, 그 중 선봉대로서 1개 대대가 거제도에 상륙하여 포로들을 해방시키려고 전진 중에 있다." 고 전혀 사실과 맞지 않는 말로 그들을 현혹시켰다. 그리고 거제도에 상륙할 그 선봉부대를 맞이하기 위해서는 투쟁 실적이 있어야 한다는 논리를 폈다.
소위 인민재판을 한 후 즉석에서 타살된 반공포로들
그 투쟁 실적이란 것이 '반동분자들을 색출하여 처단' 하는 것이었다.
이와 같은 지령과 선전 선동은 즉각적으로 모든 친공포로들을 자극함으로써 그중 일부는 미치광이가 되어 수용소마다 반공포로들을 찾아내어 운동장으로 끌어냈다. 그리고는 형식적인 소위 인민재판을 한 후 즉석에서 타살하였다. 각 수용소에서는 10명 내지 30명씩의 반공포로들이 무참하게 학살 당함으로써 전 수용소에서 희생된 숫자는 300명에 달했다.
9·17사건이라 불리는 이 폭동은 9월 20일까지 계속되어 각수용소에는 인공기가 나부끼고 거제도가 마치 공산군의 병영이라도 된 듯 착각을 일으킬 정도였다. 다만 우익계가 장악한 포로수용소에서는 이와 같은 폭동이 일어나지 않았는데, 이는 좌익계가 열세하여 폭동을 일으키지 못했을 따름이었다.
이 사건은 좌익 친공포로들의 야만성과 잔인성을 여지없이 드러냈다. 그리고 그 반대로 우익 반공포로들에게는 적개심을 불러일으켜 더욱 공고한 단결을 가져오게 했다. 그런데 이런 일이 있고 난 후에도 포로수용소 당국은 종전과 다름없이 철조망 밖에서 감시만 할 뿐이었다. 특히 밤에는 친공포로들이 천막 안에서 반공포로를 상대로 사형(私刑)을 가하거나 살해를 해도 속수무책이었다. 그들은 살해를 할 때도 특급이라 하여 돌로 머리를 쪼아서 타살하고, 1급은 곤봉 500대, 2급은 400대, 3급은 300대를 치는데 대개 30대 정도에서 절명하였다고 한다. 시체는 솜으로 입을 틀어 막은 다음 변소 또는 수용소내 땅에 매장하거나 때로는 철조망밖에 버리기도 했다.
이런 중에서도 그해 12월 23일 밤에 제73구역에서는 150명의 친공포로들이 성탄절 축하 준비를 하고 있던 반공포로 60명을 습격, 난타하여 한 명이 죽고, 32명이 중경상을 입는 불상사가 발생하였다. 이처럼 수용소 내에서의 친공포로와 반공포로의 세력 다툼은 날이 갈수록 격화되었으며, 언제 격렬한 충돌이 일어날는지 알 수 없는 긴장된 날들이 계속되었다
천공포로와 반공포로의 격돌
천공포로와 반공포로의 격돌
반공포로들과 대립을 위하여 인공기를 게양
1952년초 친공포로의 송환 분류 심사 거부로 일어난 2.18 폭동이 진압되고 나서도 각 친공 수용소에서는 밤마다 반공포로들이 인민재판에서 사형을 선고받고 타살되고 있었다.이 해 3월 16일 오후에는 친공포로 일색인 제95구역에서 약 50명의 반공포로들이 결사적으로 탈출하여 철조망 쪽으로 달려 나왔다. 친공포로들은 이들을 향하여 돌을 던졌다. 사지를 탈출하려는 포로들을 국군 감시병들이 보호했고, 수용소 소장 돗드 준장이 현장에 나타났다. 소장의 명령으로 수용소 정문이 열리자 사지를 빠져나온 반공포로들은 수용소장에게 제92, 95구역의 수용소를 해산시키고 우익계 포로들을 구출하라고 간청했다. 그들은 말하기를 "95수용소 안에는 우리와 같은 동지들이 많이 있는데 오늘 중으로 나오지 못하면 다 죽게 된다. 나오다가 잡힌 사람도 많이 있다. 그리고 놈들은 사람을 죽여서 그 피로 깃발을 만든다. 저 지붕 위에 있는 인공기를 봐라."
95수용소에 걸려 있는 깃발을 바라보았을 때 그것이 물감으로 그린 것이 아니라 피로 만들어졌다는 것을 육안으로도 알 수가 있었다. 빛깔은 자색으로 변색되었고, 기폭이 뻣뻣해져서 바람에 잘 나부끼지도 않았다.
친공포로의 대표적인 수용소인 76,77,78수용소를 겨냥한 미군경비대 탱크의 포신
반공포로들의 탈출을 목도한 반공청년단에서는 긴급회의를 열고 다음 날인 17일에 반공 총궐기대회를 개최하기로 결의, 이를 우익계 수용소인 제71, 72, 73, 74. 81, 82, 83, 84, 91, 93, 94, 96 등 각 구역에 통보했다. 반공 총궐기대회는 비폭력으로 각 수용소 안에 태극기를 걸고 각종 구호를 외치며 인접해 있는 좌익계 수용소를 위압한다는 단조로운 시위였다. 그리고 제93구역에서는 제92, 95구역 등 좌익계 수용소에 대하여도 적극적인 시위를 하기 위해 국군 제33경비대대 소속인 제5중대장의 협조를 받기로 되어 있었다.
17일 아침 각 수용소에서는 하늘 높이 태극기를 게양하고, 목이 터지도록 대한민국 만세를 외치며 기세를 올렸다. 오후에는 계획대로 제93구역을 비롯한 제91, 94, 96구역에서 반공 시위를 감행했는데 이 때에는 제5경비중대장 강대위가 지휘하는 소대병력이 이들을 엄호하고 있었다.시위 행진부대는 친공 제92구역 앞길을 지나면서 구호를 제창했다. 이 때 제92구역에서는 시위부대에 대해 투석공격을 시작했다. 시위부대는 많은 인원이 부상을 입었으나 대항은 하지 않고 그대로 전진하였다. 그러다가 참다못한 강대위가 권총을 뽑아 사격 신호를 내렸다. 사방의 국군 감시대에서는 일제히 공중에다 위협사격을 가했다. 그래도 친공포로들은 계속 돌을 던졌다. 총성 때문에 미군 감시병들까지 출동했으나 그들은 가세하지 않았다. 총에는 당할 수 없었던지 친공포로들의 투석이 줄어들어 멈추자 사격도 멈췄다. 우익 시위부대들은 부상자들을 수습하여 각 수용소로 돌아갔다. 수용소 내로 들어가서도 밤새도록 시위를 계속했다. 시위는 전체 우익 수용소에서 반공 총궐기대회의 명목 아래 18일에도 계속되었다.
학살된 반공포로들은 막사 주변에 암매장 되었다.
17일의 충돌로 친공 제92구역소의 희생자는 30여명 이었는데 그들 대부분이 병원으로 실려갈 정도의 중상이었던 것으로 알려졌다 그들이 경비대에게. 사격을 할 수 있는 구실을 주고 도전을 가해. 왔으므로 지금껏 참아온 울분을 응징한 것이라고. 우익계 포로들은 생각하였다. 이런 시위는. 29일까지 계속되었다.
한편 좌익계 수용소인 제76, 77, 78구역에서도. 우익과 맞서서 또다른 시위를 벌이고, 수용소. 벽과 철조망에 삐라와 플래카드를 게시하였다.. 양쪽이 일촉즉발의 험악한 분위기를 연출하고. 있었던 것이다.
이와 같은 포로들의 시위로 좌우익간의 충돌이 우려되자 한·미경비대는 비상 경계에 들어갔다. 이때 제77구역 내에는 우익계 포로 약 160명이 위협을 받고 있다는 탈출 포로의 정보를 입수하였으나 미군 당국은 한발짝도 수용소 안에 들어가지 못함으로써 그들은 분명 학살되었을 것으로 추측되었다.
제95구역은 이후에도 악질 친공포로의 소굴로서 포로수용소 당국도 접근할 수 없는 영역으로 남아 있었으며 한국군 경비대와도 충돌을 일으켰다. 이 구역은 국군 제33경비대대 제5중대 경비구역이었는데, 1952년 4월 10일에도 경비병과 포로들 간의 욕설이 빌미가 되어 가벼운 총격전이 있었다. 그리고 이 일이 계기가 되어 한·미 경비병과 포로들 간에 충돌이 발생하여 한국군 경비대측에서는 4명이 사망하고 5명이 중상을 입었으며, 미군 대위 1명이 부상을 입는 결과를 빚었다. 포로측은 30명이 피살되고 80명이 부상을 입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