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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로의 소요와 폭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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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거제도로 옮겨진 포로문제
    거제도로 옮겨진 포로문제
막사내에서 폭동을 주도한 자가 경비병에게 붙잡혀 나오고있다.막사내에서 폭동을 주도한 자가 경비병에게 붙잡혀 나오고있다.
부산에 있던 포로가 거제도로 옮겨옴에 따라서 포로문제도 자연히 거제도로 옮겨오게 되었다. 그러나 처음 몇 개월간은 비교적 평온했다. 이 기간은 수용소 부지 정리 및 시설의 확장, 포로 배치작업 등으로 분주한 때였다. 가끔 한국 경비병과 북한 포로 사이에 사소한 시비로 인해서 충돌이 발생하기는 했으나 큰 피해는 없었다. 이 시기에 있었던 싸움이나 저항은 집단적, 사상적인 것이라기보다는 개인적, 감정적인 성격이 강했으며, 대부분이 우발적으로 일어난 것들이었다.

이때 쌍방이 다툼을 벌이게 되었던 원인 중의 하나는 한국군 경비병보다 북한 포로에 대한 대우가 더 좋다는 사실이었다. 포로 관리의 책임을 맡고 있는 미군 당국은 포로의 대우와 인권 존중이라는 제네바협약을 준수하는데 치중한 나머지 그들에게 더 극진한 대우를 하였다. 그래서 피복이나 급식면에서 경비병보다도 오히려 포로들이 더 낫다는 사실이 한국군 경비병들의 감정을 상하게 했던 것이다.
그렇지만 이때에도 포로들은 북한 인민군 군가를 부르거나 공산주의를 찬양하는 선동적인 연설을 하고 미국인을 격렬히 증오하는 구호를 외쳐대는 등의 저항 행동을 했다. 그와 함께 1951년 3월에 만도 여섯 번의 단식투쟁 및 연좌시위와 네 번의 자해사건이 발생했다.제네바협약은 포로의 인권을 보호하는 정신으로 일관되어 있을 뿐, 포로들이 조직을 만들어 적극적으로 시위를 전개하거나 폭력을 휘두르는 일까지 고려하지는 못했다. 이때문에 포로들의 저항 활동이 격렬해져도 그것을 저지·규제할 수 있는 규정이 없었다. 이렇게 볼 때 거제도는 이미 공산주의자들의 활동의 표적이 될 소지를 내포하고 있었던 것이다

포로가 소요나 폭동을 일으키게 되면 제일 먼저 곤욕을 치르는 것은 한국군 경비병들이었다. 이들은 소수의 인원으로써 엄청나게 많은 포로들을 경비해야 하는 부담을 안고 있었다. 뿐만 아니라, 미군의 지휘를 받고 있어서 사실상 포로 관리에 대한 실권이 없다 는 것도 행동의 제약 요건이 되었다.경비 근무중에 한국군 경비병과 포로가 충돌해도 미군측에서는 가능하면 개입하지 않으려는 태도를 취했다. 어떻게 하면 좋을지 몰랐던지, 아니면 휴전회담이 곧 시작되고 멀지 않아 전쟁이 끝날 것이므로 가만이 두면 문제 가 수그러들 것이라 생각했을 수도 있다. 또한 제2차 세계대전 때 포로수용소장들이 심각한 수난을 겪었던 전례가 있었기 때문에 6·25전쟁에서 포로수용소장직을 맡은 사람들의 심리가 위축되어 있었던 때문인지도 모른다.
  • 저항운동의 시작
    저항운동의 시작
포로들이 자기 주장을 요구하여 시위를 시작하였다. 사진은 친공 포로의 지휘본부 역활을 한 78수용소와 경계병포로들이 자기 주장을 요구하여 시위를 시작하였다. 사진은 친공 포로의 지휘본부 역활을 한 78수용소와 경계병
거제도를 소요와 폭동으로 얼룩지게 했던 포로들의 단체 저항 움직임은 부산으로부터 포로를 수송하던 마지막 단계인 1951년 6월부터 서서히 그 조짐을 보이기 시작했다. 포로들이 새로운 수용소에 도착한 이 시기에 북한군 장교 포로들이 들어 있는 제7구역의 제72소구역에서 제일 먼저 문제가 발생했다.

6월 18일에 제72소구역에서 위생 검사와 급식 문제가 발단이 되어 포로들이 식사를 거부하고 소요를 일으켰다. 그들은 노래를 부르고 깡통을 두드리며 돌을 던지면서 날뛰었다. 식사 거부와 소동은 다음날 아침에도 계속되었다.

장교 포로인 그들은 인근에 있는 "모든 구역의 통제권"을 요구했다. 그렇지만 수용소 당국이 그것을 들어줄 수는 없었다. 포로들은 식사를 치우기 위해 수용소안으로 들어간 작업반을 향해 돌을 던져서 미군 장교와 사병 몇 명이 부상을 입었다. 계속해서 포로들이 함성을 지르며 문을 향해 돌진하기 시작했으므로, 이에 대항해서 경비병들이 사격을 하였다. 사격을 받게 되자 정문으로 쇄도하던 포로들은 천막으로 되돌아갔고 결국 노래와 투석도 그쳤다. 그러나 이 과정에서 3명의 포로가 죽었고,8명이 중상을 입었다.
폭동진압을 하고 있는 경비병폭동진압을 하고 있는 경비병
이 사건은 거제도에서 포로들이 일으킨 저항운동이 단체의 움직임으로 나타나게 된 첫 번째 사례였다. 하지만 그 당시로는 이것이 일련의 연속적인 사건의 서곡이 될 것이라고 심각하게 생각하는 사람은 없었다.그런데 바로 그 다음달인 7월에 휴전회담이 열리자 수용소 내의 분위기가 이상하게 끓어오르기 시작했다. 조만간 전쟁이 끝날 것이라는 전망과 함께 포로송환이 현실적 문제로 대두되기 시작했던 것이다. 많은 포로들이 북한 또는 중국으로 돌아갈 것을 거부하는 뜻을 나타내기 시작하였고, 포로들 간에 친공과 반공의 편갈림이 생기면서 양자 간의 마찰이 표면화되기 시작했다.
그들은 수용소 근처의 민간인이나 피란민을 돈으로 매수하여 외부의 게릴라를 통해 북한과 연락을 취하고 전언(傳言)이나 투석(投石), 시호통신(視互通信)등으로 타지역과 연락하여 암암리에 조직을 만들고 정보를 교환하였다. 또 그들은 대수롭지 않은 일도 시비거리나 투쟁의 대상으로 삼아서 저항의 빌미로 만들었다. 이처럼 친공포로의 조직이 위협적인 세력으로 형성되자 한편 으로 반공포로들도 단결하게 됨으로써 양자가 충돌하기 시작했다. 반공계 포로는 조직면에서 친공계 포로들을 뒤따라가는 정도의 수준이었다. 친공포로의 활동이 처음부터 의도적이고 계획적이었던 반면, 반공포로의 활동은 자기 보호를 위한 자구책의 방편이라는 성격이 강했다.
이송되어 막사 배치를 위하여 대기중인 포로들, 위쪽에 희미하게 보이는 섬이 죽도다.이송되어 막사 배치를 위하여 대기중인 포로들, 위쪽에 희미하게 보이는 섬이 죽도다.
이렇게 해서 수용소 내부는 소요와 난투극의 마당으로 바뀌게 되었다. 밤에는 경비병의 순찰이 없는 것을 기회로 해서 살인, 구타 행위가 빈발하여 희생자가 속출했으나 수용소 당국은 모른 척하였다. 사법권이 없는 수용소장으로서는 증거가 분명해도 어떻게 할 수가 없었다.사소한 일로 포로들이 시위와 난동을 부리는 행동은 1951년 7월에 일어난 사건을 예로 들 수 있다. 제2군수사령부는 여름 제복으로 포로들에게 붉은 색상의 짧은 소매 상의와 짧은 바지 한 벌씩을 지급했는데, 유독 북한군 포로들은 그 색상이 일본을 의미한다 하여 입기를 거부하여 옷뭉치를 집어던지는 등 난동을 부렸다. 이 과정에서 경비병들의 위협사격으로 3명의 포로가 사망하였다. 또 제65수용소의 포로들과 한국군 경비병들 간에 충돌이 벌어져서 포로 3명이 사망하고 26명이 부상을 입는 사고가 발생하기도 하였다.

1951년 후기에 유엔군사령부가 처음으로 북한 포로 첩보원들을 체포하였는데, 그들은 포로수용소 안에서 소동과 폭동을 선동하기 위해 훈련을 받았으며 그 임무를 수행하기 위해서 의도적으로 포로가 되었다는 사실을 진술했다. 상황이 이렇게 악화되자 이런 실정을 보고 받고 현지를 시찰한 밴플리트 장군은 포로수용소 경비병력을 더 보내도록 해서, 1951년 말에는 9,500명이나 되는 관리 요원이 거제도에 배치되었다. 그러나 그렇게 해도 수용소에서 요구했던 규모보다는 6천명이 부족한 실정이었다.
경비 태세는 어느 정도 좋아졌으나 구역 내에서의 친공포로와 반공포로의 투쟁은 계속 가열되기만 했다. 어느 한 편이 상대에게 전면 항복하지 않는 한 구역 내의 패권 싸움, 예를 들면 구타, 사형(私刑), 인민재판과 이것들을 제지하거나 보복하려고 하는 폭력 행위 등은 그칠 수가 없었다. 급기야 1951년 12월 18일에는 투석전이 일어나서 14명의 사망자와 많은 부상자가 발생하게 되었다. 이처럼 흥분된 분위기는 포로심사 문제가 대두되면서 더욱 고조되었다.
  • 해방운동과 특별공작대
    해방운동과 특별공작대
거제도 포로수용소의 이학구, 폭동을 주도함으로써 연행되고 있다.거제도 포로수용소의 이학구, 폭동을 주도함으로써 연행되고 있다.
포로들이 거제도로 이송된 후 포로수용소가 제자리를 잡은 51년 4월부터 친공포로들은 수용소 내에 소위 [해방동맹] (일명 [용광로])이라는 비밀 조직체를 만들어 그 본부를 제77수용소에다 두고 각 수용소 단위로 지부를 두었다. 그리고 친공포로들의 모든 행동은 해방동맹의 명령과 지시에 의해 좌우되었다. 해방동맹의 내부 조직으로는 군사행동부, 정치보위부, 내무부, 민청행동결사대, 당간부학교, 인민재판소 등을 편성하여 마치 포로로 구성된 소정부를 형성한 것과 같았다.

그런데 이런 해방동맹이라는 조직을 만들고 움직인 자는 도대체 누구였을까? 해방동맹을 조직하였을 것으로 믿어지는 자는 북한 공산군 전사 출신이라고 알려진 홍철인데 그의 정체는 알려지지 않았으나 배후 인물임엔 틀림없다는 주장이 있다. 홍 외에 또 한 사람으로 이학구 총좌가 있었다. 그는 남침 당시 북한 인민군 제2군단 작전참모였고, 낙동강전선에서는 제13사단 참모장으로서 1950년 9월 21일 다부동에서 미 제1기병사단으로 투항해 온 사람이었다. 그는 포로 중의 최고위 계급자로서 해방동맹을 조직한 실질적 인물은 아니더라도 홍철과 더불어 그 조직을 조종하는 인물임엔 틀림없었다.
어쨌든 계급이 높았던 만큼 이학구는 표면상으로는 포로의 대표 행세를 하였다. 그가 정체 불명의 인물과 더불어 전수용소의 통솔권을 장악한 것만은 사실이었다. 판문점 회담이 절정에 이르자 그는 전 거제도 수용소의 이른바 대열 강화 사업에 착수, 비밀리에 각 수용소 간의 통신망을 조직하여 각종 연락을 취하고 있었다. 또 그는 수용소 당국에서 요구하는 포로 명부 작성 제출도 거부케 하고 송환 분류 심사에도 응하지 말라고 지시를 내렸다.
폭동진압에 항거하기 위하여 자체 군사훈련을 하고 있는 친공포로들폭동진압에 항거하기 위하여 자체 군사훈련을 하고 있는 친공포로들
1951년 5월에는 제92구역에 북조선 노동당 거제도 지부가 조직되었고, 각 구역에도 연락소가 조직되었다.이들은 '생명을 희생하여 당을 위해 능력을 발휘'한다는 선언서를 채택하고 저항활동을 펼쳤다. 친공포로들의 표면적인 최초 행동은 수용소 내에서 적기가를 부르는 것으로 시작되었다. 그런데도 수용소 당국에서 하등의 제재가 없자 그들은 더욱 대담해져서 인공기를 게양하고 어느새 인민군 복장까지 만들어 입었다. 뿐만 아니라 그들은 보급품을 팔아서 광목을 구입하여 큰 글씨로 『민족반역자 이승만을 때려 죽여라!』『미제국주의 침략자를 타도하자!』 등의 플래카드를 우리말과 영문으로 써서 철조망에 내걸었다.

이렇게까지 수용소 안이 온통 친공포로들의 광란장소로 변하여도 수용소를 관리하는 미군 당국은 그냥 보고만 있는 자세였다. 수용소장은 후방기지 사령관(수용소 관할의 직속 상급 사령관)이나 또는 그 이상의 지휘 계통으로부터 어떤 특별한 지시도 받지 못하고 있어서, 그로서는 포로를 제약할 수 있는 방도가 달리 없다고 생각했던 것이다.고급 사령부의 이러한 무관심은 휴전이 성립되는대로 포로들을 송환해 버리면 그만이라는 안이한 발상에서 나온 것이었다.
사건의 초기에 신경을 써서 적절하게 대응하지 못한 것이 사태를 악화시키는데 일조를 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이런 일을 겪을 때마다 한국군의 경비 책임자나 감시병들의 분노는 말할 수 없었지만 포로 관리에 대한 권한이 없고 경비 담당에 지나지 않아 별 도리가 없었다. 만약 한국군에 관리권이 있었다면 친공포로들이 그렇게 날뛰지 못했을 것이며, 무법천지같은 혼란 상태도 발생하지 않았을 것이었다 . 한국군이나 유엔군의 포로들이 북한에서 어떠한 대우를 받고 있다는 것을 유엔군 당국은 알고 있었다. 만일 유엔군측도 공산군측의 수법 그대로 친공포로를 다루었더라면, 그들이 감히 포로가 된 나라의 수용소에서 자기 나라의 기를 게양하고 자기 나라 노래를 공공연히 부를 수는 없었을 것이었다.
포로들의 통신본부로 활용된 64포로병원포로들의 통신본부로 활용된 64포로병원
이러한 때, 북한측에서는 [특별공작대]라는 특수 조직체를 만들어 암약하기 시작했다. 북한군 총사령부에 소속된 이 조직체의 임무는 전선에서 자진 투항하여 포로의 신분으로 수용소에 들어가 특별 지도 사명을 수행할 공작대원을 훈련시키는 한편, 포로와 관련된 정보를 수집하여 보고하는 것이었다. 이 공작대는 사실상 남일에 의해 지휘되었는데, 그는 북한 공산군내 정치보위부의 책임자로서 이런 일은 그의 소관이었다. 남일은 휴전회담이 개시되자 직접 특별공작대를 편성하고 2개월에 걸쳐 각종 훈련과 교육을 시킨 다음 조직적으로 전선을 통해 수용소에 침투시켰다.

한편 수용소의 외부에서 암약하는 남녀 공작대원들은 피란민으로 가장, 남하한 다음에 간호원 등으로 포로수용소 병원에 취직하거나 수용소 부근에서 적당한 장사를 하면서 내외의 연락을 유지하는 일을 담당했다. 수용소 내에 침투한 공작대원들은 지령에 의해 먼저 각 단위 수용소 내에 세포조 직위원회를 만들려고 시도했다. 이들은 수용소 내에 위계 체 계를 세우기 위해 장교들을 세포 조직망의 책임자로 배치시켰 다. 계급이 지배력을 갖도록 함으로써 목적을 달성코자 했던 것인데 이학구 총좌가 표면적으로 포로의 대표가 된 것은 이런 데서 연유했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특별 공작대원들의 또다른 임무는 각 포로들의 과거와 현재를 조사하는 일이었다. 즉, 포로들이 포로가 된 동기를 조사하고 수용소에 들어온 후 변절한 자, 자발적 이탈자, 밀고의 혐의가 있는 자 등을 가려내는 일이었다.
  • 공작대 활동의 가장 중요한 요소는 통신이라고 할 수 있었다. 이들의 통신 구조는
  • 각 수용소 내의 연락망
  • 수용소측 지휘부에서 수용소 내의 일반 포로 및 공작대원들에게 연결되는 연락망
  • 수용소에서 북한으로 보내는 연락망의 3원적(三元的) 체계를 이루고 있었다.
  • 포로들의 통신본부는 제64포로병원 장교 병동이었다.
모든 통신 정보와 지령은 일단 장교병동에 집중되었다가 분배되었다. 외부로 보낼 통신을 가진 포로들은 환자로 가장하여 입원하였으며, 퇴원하는 환자들이 그것을 받아 각 수용소에 전달하였다.

또한 공산군 총사령부는 거제도 포로와 판문점 대표들 간의 공동 노력을 조정하기 위한 통신 방법으로서 [첩보부]와 [유격지도부]를 이용하였다. 유격지도부는 통신을 전달할 급사를 파견하였고, 첩보부는 10∼12명의 장교와 하사관으로 편성된 공작대를 내보냈다. 이 공작대는 소련제 휴대용 무전 수신기를 갖고 구역 간 통신 연락을 담당하였다. 이 두 기관은 포로들의 통신을 그들의 총사령부에 전달하는 일도 수행하였다.그러면 거제도 포로수용소에서 북한으로 연락하는 통신은 어떠한 경로를 밟았던가? 이는 남한의 공산 간첩망을 조종하고 있는 첩보부의 비밀정보대에서 관장하였다. 이 공작대원들은 피란민으로 가장하여 수용소 부근의 민간 부락이나 피란민 부락에 잠입했다

그들은 포로작업대가 수용소 밖으로 나오면서 약속된 장소에 투하해 놓은 통신문을 북으로 보내고, 또 같은 방법으로 북의 지령문을 포로들에게 전달하는 통신 수단을 주로 썼다.

특별공작대의 암약이 시작되자 공산측에서는 거제도 포로 전체를 지휘할 우두머리가 필요하게 되었다. 이런 목적으로 밀파된 자가 북조선노동당의 부위원장 감투를 쓰고 있던 박상현이라는 자였다. 그는 전선에서 계획적으로 포로가 되어 1951년 11월경에 거제도 포로수용소에 들어오게 되었다.무명 전사로서 위장하여 제77포로수용소에 수용된 박상현은 해방동맹의 조직을 인수하여 각 수용소의 세포 조직을 재점검, 정비 확대하고 일사불란한 지휘 계통을 확립했다. 따라서 그동안 포로 대표였던 이학구는 명목상의 대표가 되고 모든 실권은 박상현에게로 넘어갔다. 이리하여 특별공작대와 해방동맹은 북한군 총사령부에서 내리는 지령에 의해 언제든지 행동할 수 있도록 조직의 정비를 완료했던 것이다. 이후 박상현은 수용소장 돗드 준장 납치사건 등 온갖 폭동사건을 현장에서 조종하였다. 그러나 그후 그는 이학구 등과 더불어 폭동의 주모자로서 수용소 당국에 체포되었다. 분리 수용된 그는 밀파되어 온 최후 목표가 달성되기 전에 수용소 내의 조직이 와해되자 심경의 변화를 일으켰다. 그리고 자신이 북에서 받은 지령, 포로 조직, 투쟁 계획과 운영 방법, 남일의 지령 등 일체의 내용을 스스로 폭로했다. 그는 그후 또다시 변절하여 포로 송환 때 북한으로 가서 이학구와 더불어 환대를 받고 건설사단장 자리에 앉게 되었지만, 얼마 후 여러 가지 죄명을 뒤집어 쓴 끝에 숙청 당한 것으로 알려졌다.
  • 송환심사에 대한 항거폭등
    송환심사에 대한 항거폭등
포로심사에 항거하자 미군들이 방독면을 쓰고 진압한 후 수용소 밖으로 나오고 있다.포로심사에 항거하자 미군들이 방독면을 쓰고 진압한 후 수용소 밖으로 나오고 있다.
휴전 회담에서 포로 문제가 논의될 때 가장 격렬하게 대립되고 또 오랫동안 쟁점이 되었던 점은 '자원송환' 과 '강제송환'이었다. 자원송환은 포로 본인의 의사를 물어 송환 여부를 결정케 하는 것으로서 이 숫자가 얼마나 되느냐 하는 것은 유엔군측에서도 파악할 필요가 있었고, 또한 공산군측에서도 궁금하게 여기던 사항이었다. 따라서 공산군측 대표는 북한 및 중국으로 송환되기를 거부하는 포로가 실제로 얼마나 되는가를 알고자 포로들을 심사한 다음 그 포로 수를 제시하라고 유엔군측에 요구했다. 그런데 이처럼 송환 여부를 알고자 그 심사 실시를 인정하고서도 공산군측은 포로들에게 분류심사를 거부하도록 지령을 내렸다 남일이 바로 그 주모자로서 그는 회담 장소에서는 송환 거부 포로 숫자를 제시하라고 유엔군 측에 요구했으면서도, 한편으로는 거제도의 박상현에게 송환 심사를 거부하라고 지령함으로써 결과적으로는 그들의 주장대로 강제송환의 목적을 달성하려고 했던 것이다. 이렇게 되어서 친공포로들은 포로 명부 제출을 거부하는 동시에 송환 심사에도 응하지 않도록 단단히 지시를 받고 있었다.
심사를 실시하지 못한 구역 중에는 제62구역이 있었다. 여기서는 공산주의자들이 완전히 통제를 하고 '전원이 북한으로의 귀환을 희망하고 있으므로 심사는 시간 낭비'라고 선언하면서 유엔군측 심사관을 들어오지 못하게 하고 있었다. 그렇지만 유엔군측은 심사를 강행하기로 결정하고 이를 위해서 실력 행사를 계획하였다. 이 구역에는 대부분 서울 출신의 의용군들이 있었으며 그중 절반이 대학 재학생으로서 사상적으로는 완전한 적색분자의 친공 수용소였다. 포로수용소 당국도 이런 형편을 알고 있었으므로 심사반은 신중한 계획을 세워 무장 병력의 특별 엄호하에 집단의 힘을 분산시키기 위해 구역을 4분하여 격리시키고 각 소구역별로 심사를 실시키로 하였다.

그래서 1952년 2월 18일, 새벽 2시부터 수용소 내의 통행이 금지되고 날이 밝을 무렵에는 심사반과 함께 착검한 미 제25사단 제27연대 제3대대 병력이 수용소 내에 투입되었다. 그런데 막상 심사를 하려고 수용소에 들어가자 포로들은 미리 준비해두고 있던 몽둥이, 도끼, 삽, 곡괭이 자루, 칼, 죽창, 천막지주 등을 휘두르며 저항하였다. 그리고 1,000∼1,500명의 포로들이 일렬로 서 있는 경비병에게 다가왔다. 이렇게 되자 양측은 격돌하게 되었고, 수용소 안은 일대 격전장으로 변하고 말았다. 미군들은 처음에는 공포탄을 발사하였으나 포로들이 달려들자 마침내는 발포까지 하게 되었다. 결국 폭동은 진압되었으나 이 사고로 55명의 포로가 즉사하고 162명이 부상당했으며 부상자 중에서 22명은 병원에서 죽었다. 미군의 사상은 사망자 1명, 부상자 38명이었다.이 사건으로 수용소장인 피츠랄드 대령은 부사령관으로 격하되고 2월 20일 새로운 사령관으로 돗드(Francis T. Dodd) 준장이 부임하였다. 또 이 사건에 대해 미 공간사에는 "공산주의자들이 치른 대가는 컸다. 그러나 그들에게 있어서 인명은 문제가 되지 않았으며 오직 목적 달성만이 문제였다. 결국 그들은 목적을 달성한 것이다. 미군은 철수했고 이 구역은 다시 심사하지 않았다."고 기술되어 있다.이 사건은 공산측의 선전 자료가 되어 1952년 3월 초순 판문점에서는 항의 소동이 일어났다. 유엔군측은, 민간인 억류자 심사는 한국의 내정 문제이며 휴전회담의 범위 밖이라고 하여 곤경을 모면했다. 그러나, 유엔군사령관이 수용소장을 경질하고, 제8군 사령관 밴플리트 장군에게 '자체 계획에 의하여 포로를 철저히 통제하라'고 지시했던 사실을 보면, 이 사건으로 인한 충격이 대단히 컸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것은 수용소 내의 지휘 계통을 확립하고 이런 사건의 재발을 방지하기 위한 조치였으나, 포로들의 소동은 전혀 가라앉을 기미를 보이지 않았다.

내부적으로는 이처럼 복잡하고 혼란스러웠으나 외부에는 잘 알려지지 않았던 거제도 포로수용소의 실정이 전세계 사람들의 관심을 끌게 된 것은 포로수용소장 돗드 준장의 납치사건 때문이었다.
  • 돗드 포로수용소 피랍
    돗드 포로수용소 피랍
돗드 준장의 피랍 당시 포로들이 그를 에워싼 채 수용소 안으로 끌고 들어가는 상황을 그림으로 나타냄돗드 준장의 피랍 당시 포로들이 그를 에워싼 채 수용소 안으로 끌고 들어가는 상황을 그림으로 나타냄
소장으로 부임한 이후로 돗드준장은 수용소의 분위기를 부드럽게 하려고 노력했으며, 포로 지휘자들과 대화하는 경우도 있었다. 포로들을 가깝게 만남으로써 실정을 파악하고 친근감을 갖게 하려는 생각에서였다. 포로들은 이러한 사실을 알고서 미리 계획을 세웠다.

후일 박상현이란 자의 증언에 의하면, 수용소장 납치 기도는 한 달전부터 북한의 남일(휴전회담의 공산군측 수석대표)의 지령에 의해 계획된 것이었다.

이런 사실을 알지 못한 돗드준장은 1952년 5월 7일 제76구역의 포로들이 그들의 처우에 불만을 품고 수용소장과의 면담을 요청한다는 보고를 받고 그 요청에 응하기로 하였다. 그의 보좌관들은 2·18 항거폭동 이후 포로들이 과격한 행동으로 일관하고 있으니 면회를 거절하라고 종용했으나, 그는 듣지 않고 제76구역의 출입구에서 직접 포로들과 만났다. 그때 포로 작업반이 수용소에서 나오고 있었고, 유엔군 경비병들은 그들이 나갈 수 있도록 출입문을 열어주었다. 작업반이 나간 후에도 그 문은 계속 열려있었는데, 포로들이 그곳으로 나와서 돗드장군 주위에 모이기 시작했다. 그가 그 면담을 마치고 떠나기 위해서 막 돌아섰을 때, 별안간 포로들이 그를 에워싼 채 수용소 안으로 끌고 들어갔다.
돗포로들에게 납치 되었던 돗드준장포로들에게 납치 되었던 돗드준장
그 직후에 포로들은 「우리는 돗드를 체포했다. 우리의 요구가 해결되는 한 그의 안전은 보장될 것이다. 만약 총을 쏜다든가 하는 그런 야만적인 행동이 일어난다면 그의 생명은 위험해질 것이다.」라는 플래카드를 내걸었다. 돗드장군이 체포된 후에 콜슨(Charles F. Colson)준장이 포로수용소장에 임명되었다. 그는 포로들에게 돗드장군의 즉각적인 석방을 요구했으며, 만약 포로들이 돗드장군의 석방을 거부한다면 사태를 해결하기 위해서 무력을 사용하겠다고 포로들에게 경고하였다.

사고가 발생하자 미 제8군사령관 밴플리트(James A. Van Fleet) 장군이 두 차례나 거제도를 찾아와 사태를 검토했는데, 포로들의 불합리한 요구엔 응할 수 없다는 판단을 내렸으며, 필요하다면 무력을 사용해도 좋다는 허락을 하였다. 전차가 거제도로 수송되었으며 수용소 안에 들어가서 힘으로 돗드장군을 구출할 계획이 수립되었다. 무력행사의 결행일은 5월 10일로 정해졌다. 그러나 포로들의 태도는 조금도 수그러들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오히려 수용소 당국이 무력 행사로 돗드 장군을 구출하겠다는 소문이 돌자, 포로들은 돗드 장군을 살해하고 동시에 전수용소에 폭동을 일으키겠다고 협박을 하면서 콜슨 수용소장의 돗드 석방 통첩을 묵살했다.포로들의 반응이 이렇게 나타나자, 콜슨 장군은 포로들의 요구에 응하기로 결심을 변경하게 되었다. 이리하여 그는 포로들의 요구사항에 대한 수락의 내용을 담은 각서를 보냈다. 이 각서는 3차에 걸쳐 포로들의 구미에 맞도록 수정되어 그들에게 넘겨졌다.
돗드준장납치사건이후 사건해결을 하지못하고 포로에게 굴복한 콜슨 장군을 해임하고 새로 부임한 보트너준장돗드준장납치사건이후 사건해결을 하지못하고 포로에게 굴복한 콜슨 장군을 해임하고 새로 부임한 보트너준장
콜슨준장의 서면각서를 받아낸 포로들은 마침내 돗드 장군을 풀어주었다. 포로가 된지3일만이었다. 그러나 돗드장군은 자신의 실책에 대한 책임을 추궁 당하게 되었으며, 이 일의 수습을 책임맡았던 콜슨 장군도 사태 처리 방식에 대해 비난을 받게 되었다. 유엔군사령관 클라크(Mark W. Clark) 대장은 5월 12일부로 콜슨 장군을 포로수용소장 직에서 해임하고, 그의 후임으로 미 제2사단 부사단장인 보트너(Hayden L. Boatner) 준장을 임명하였다. 그리고 진상조사단의 보고를받고 돗드 및 콜슨 준장을 처벌하도록 워싱턴에 건의하였는데, 결국 두 사람은 대령으로 강등되는 불명예를 감수해야만 했다. 두 사람을 처벌함으로써 돗드 피랍사건이 완전히 마무리된 것은 아니었다. 교섭 과정에서 작성된 소위 "콜슨 문서"는 휴전회담장에서 공산군측이 유엔군측을 공격하는 무기가 되고 말았다. 공산군측 대표 남일은 콜슨 각서를 가지고 유엔군 대표를 악착스럽게 물고 늘어졌다. 각서에서 보인 약점을 들어 최대한의 선전 효과를 노렸던 것이다.

유엔군측은 그 문서의 효력을 부인했으나 문서라고 하는 증거 자료를 포로수용소장이 작성해 준 것만은 움직일 수 없는 사실이었기 때문에 유엔군측 대표의 입장은 대단히 곤란해질 수 밖에 없었다. 돗드 준장의 피랍과 그의 석방을 교섭하는 과정에서 포로를 관리하는 유엔군측이 오히려 포로에게 끌려가는 처지가 되었고, 수용소장은 굴욕적인 서명을 함으로써 포로들이 원하는 성과를 손에 쥐어준 격이 되었다. 적을 너무나 몰랐던 결과라고 할 수 있을 것이었다. 클라크 대장이 술회한 것처럼 이 사건은 종래의 전쟁에서는 볼 수 없었던 현상으로서 공산주의자들은 포로수용소 안에까지 전쟁을 확대시키고 있었던 것이다.이 사건 직후 유엔군사령관은 포로 관리에 강력하게 대처하기 위해서 일본에 주둔하고 있던 제187공수연대를 거제도로 이동하도록 하였다. 신임소장 보트너 장군은 수용소의 내막을 파악하고 관리 개선을 위해 다각적인 검토를 하는 한편, 사태 수습을 추진하였다. 그는 거제도의 포로들이 평범한 포로들이 아니며, 비록 총은 갖지 않지만 그들은 임기응변으로 경비부대를 공격할 수 있는 무장을 갖춘 전투원 으로서 저돌적이고 광신적이므로 강력한 방법에 의해 질서를 잡아야 한다고 생각하였다.
돗드준장 납치사건 후 포로관리에 강력하게 대처하기 위하여 병력 및 장비가 증가 되었다돗드준장 납치사건 후 포로관리에 강력하게 대처하기 위하여 병력 및 장비가 증가 되었다
돗드 장군 석방 후 포로들은 수용소 내에 기세좋게 인공기를 게양하고 여기저기에 미군을 모욕하는 플래카드를 걸어 두었다. 뿐만 아니라 제76수용소에 모였던 각 수용소 대표들은 다시 돌아가지 않고 그대로 머물며 무슨 음모를 꾸미고 있는 것이 분명했다. 포로들은 시위를 계속하였다. 이런 상황에서 포로 심사 같은 것은 엄두도 낼 수 없었다.

보트너 장군은 한 가지씩 문제를 풀어나가기로 하였다. 그는 우선 수용소를 관리하는 장병들 자체의 군기가 문란한 것을 보고 이를 바로잡았다. 그 다음으로는 병력을 증원하여 무력으로 포로를 제압할 계획을 세웠다. 거제도 로 부임할 때 그는 이미 유엔군사령관으로부터 포로의 효 과적인 관리와 질서 회복을 위해 무력 사용의 전권을 부여 받았던 것이다.

또 유엔군사령관이 5월 15일에 '전(前) 거제도 포로수용소 장 콜슨 준장이 포로들에게 보낸 서면답변은 완전히 무효 임'을 선언하였으므로, 이를 바탕으로 보트너 장군은 포로 들과의 약속에 구애받지 않는 과감한 태도를 견지할 수 있게 되었다. 그리하여 5월 16일 포로 대표들과 처음으로 만나는 자리에서 그는 우선 수용소 내에 게양된 인공기와 중공기를 철거토록 지시하는 동시에 포로들이 수용소 당국에 요구 조건을 제시하는 것도 금지시켰다.
그러나 친공포로 막사내에는 인공기, 김일성 초상화를 여전히 게시된 막사 내부그러나 친공포로 막사내에는 인공기, 김일성 초상화를 여전히 게시된 막사 내부
그러나 이러한 명령에도 불구하고 적기와 선전물의 게시, 욕설 플래카드, 각종 표어, 김일성과 모택동의 초상화 게시가 여전하자, 그는 무장병을 수용소 안에 진입시켜 실력으로 철거시키는 강경책을 보이기 시작했다. 동시에 계속해서 그러한 행위를 하는 포로는 발견되는 대로 사살하라는 엄명을 내리고 포로들에게도 이를 알렸다. 그후 제62수용소에서 인공기를 게양하던 포로 2명이 사살되었는데, 이후 포로수용에서 인공기나 중공기를 게양하는 일은 차츰 사라지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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