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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제포로수용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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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송되어 막사 배치를 위하여 대기중인 포로들, 위쪽에 희미하게 보이는 섬이 죽도다.이송되어 막사 배치를 위하여 대기중인 포로들, 위쪽에 희미하게 보이는 섬이 죽도다.
  • 거제포로수용소 설치배경
    거제포로수용소 설치배경
일찍이 포로의 수가 증가하고 그들을 수용·관리하는 문제가 어려워질 조짐이 보였을 때, 유엔군사령부는 그 대책을 모색하기 시작하였다. 포로를 분산시켜야 할 필요성과 공산포로들에 의해서 일어나는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고려된 대책은 전선에서 멀리 떨어지고 육지와도 격리된 섬으로 포로를 옮겨 놓는 방법이었다.

이때 유엔군사령부가 수용소 후보지로 생각한 섬이 제주도였다. 유엔군사령관은 미 제8군사령관 리지웨이장군에게 부산의 포로수용소를 제주도로 옮길 것을 고려해 보도록 지시하였는데, 리지웨이장군은 제주도가 포로수용소로서 적절하지 않다는 부정적인 견해를 표시하였다.
  • 제8군사령관이 제주도를 적합한 장소가 아니라고 했던 이유는
  • 제주도가 이미 피난민으로 초만원이 되어 있다는 점.
  • 사용할 물이 부족하다는 점.
  • 오랫동안 공산주의 세력이 강했다는 점.
  • 피난한 한국 정부가 이 섬을 임시정부의 이전 장소로서 사용할 가능성이 있다는 점 등이었다.
제주도에는 25만명의 주민이 있었는데, 여기에 포로와 수용소 경비 및 운영에 필요한 병력 등을 더하게 되면 그 인구가 2배로 늘어나게 될 것이었다. 이 섬이 그런 인구 증가를 감당하도록 하기 위해서는 많은 경비와 시간이 소요되리라 판단되었다.그러나 1950년 말에 중공군의 반격을 받아 사태가 극도로 불리해지면서 아군이 다시 서울을 빼앗기고 계속해서 후퇴하게 되자, 이번에는 리지웨이장군이 태도를 바꾸어 제주도에 포로수용소를 설치하는 것이 좋겠다는 의견을 표시했다. 1951년 1월 11일의 일이었다. 제8군사령관이 찬성함으로써 유엔군사령부는 제주도에 포로수용소를 설치할 권한을 그에게 부여했다. 그런데 포로 수용소의 위치를 선정하는 문제가 거의 매듭 지워질 순간에 거제도가 포로수용소 후보지로 떠오르게 되었으며, 결국 이 섬이 포로수용소 이전 장소로 최종 결정되었다. 거제도가 선정된 이유에 대해서는 섬이라는 조건과 육지로부터의 이동 거리 등이 고려되었던 것으로 알려졌다.

거제도를 포로수용소 적합 지역으로 판단한 이유가 공식적으로 알려진 것은 1952년 6월 9일에 열린 미 하원의 청문회이다. 이 청문회는 포로수용소장 돗드장군의 피랍사건과 관련하여 거제도 포로수용문제 전반에 걸친 사실 확인작업의 일환으로 이루어졌다. 여기에 증인으로 출석한 사람은 육군성장관(Secretary of the Army) 페이스(Hon. Frank Pace, Jr.)와 육군참모총장 콜린스 대장(Gen. J. Lawton Collins, Chief of Staff, United States Army)이였다.
  • 거제도를 포로수용소 장소로 선택한 주요 이유라고 두 사람이 밝힌 내용은
  • (섬이기 때문에) 포로 관리에 최소의 인력과 경비가 소요될 것이다.
  • 급수가 용이하다.
  • 포로들이 먹을 식량을 재배할 수 있는 어느 정도의 장소가 있다는 점 등이었다.
특히 급수문제는 중요한 요소로서 고려되었는데, 근해에 있는 여러 섬 중에서 거제도 외에는 많은 사람들이 사용할 수 있는 물 공급이 가능한 섬을 찾기 어려웠다. 제주도에는 이미 많은 피란민이 들어차 있는데다가 그들이 사용할 물도 충분치 않아서 우물을 더 파야 한다는 점이 중요하게 생각되었다는 것이다.
  • 수용시설 및 규모
    수용시설 및 규모
  • 수용시설
고현지구에 포로수용소가 시설 되고 있는 초창기모습고현지구에 포로수용소가 시설 되고 있는 초창기모습
거제도가 포로수용소 설치 장소로 확정되자 1951년 초부터 공사가 시작되었다. 몇 개의 마을이 수용소 부지로 선정되고, 부산의 포로를 이곳으로 이동시키는 "알바니작전"이 계획되었다. 계획 수립 과정에서 처음에 구상된 시설은 6만명을 수용할 규모였으나, 나중에는 22만명의 포로를 수용하는 규모로 계획이 확대되었다.

포로수용소가 설치되었던 지역은 섬의 중앙에 해당하는 일운면 고현리(현 거제시 신현읍)를 중심으로 용산, 장평, 문동, 양정, 수월, 제산리와 연초면의 임전, 송정리(포로 공동묘지 지역), 그리고 동부면의 저구리 일대였다. 전쟁 후반에 포로 분산 작전이 실시되었을 때는 이 섬의 남단 해상에 있는 봉암도, 용초도에도 수용소가 설치되었다. 수용소가 들어선 지역은 대부분이 농토와 임야로서 정부가 이를 징발해서 사용하였다.
포로수용소막내 내부 포로들은 천막으로 된 막사에서 생활했다. 포로수용소가 있던 거제도에는 당시의 수용소가 재현되어 박물관으로 남아 있다.포로수용소막내 내부 포로들은 천막으로 된 막사에서 생활했다. 포로수용소가 있던 거제도에는 당시의 수용소가 재현되어 박물관으로 남아 있다.
거제도는 포로를 안전하게 수용할 수 있다는 측면에서는 이상적인 조건을 갖추고 있는 것으로 보였지만, 수용소 시설 공사면에서는 어려운 점이 많은 곳이었다. 당시 미처 개발이 되지 않고 야산이 많았던 이 섬은 평지라고 할만한 곳이 많지 않았다. 평평한 땅이라고는 경작지로서 대부분 논이었으므로, 물을 빼고 말려서 흙을 채워 넣어야 했다. 사용할 수 있는 도로도 거의 없었으므로, 도보길 또는 우마차 길을 확장하거나 완전히 새로운 길을 만들어야만 했다.

해상으로 포로와 화물을 수송하기 위해서 선박이 접근할 수 있는 정박 공간과 시설도 새로이 만들지 않으면 안되었다.그렇지만 공사는 빠른 속도로 진행되었다. 수용소 시설은 부산 수용소와 거의 다름없었다. 먼저 도착한 포로들은 자신들이 수용될 장소에 울타리를 세우고 철조망을 설치하는 작업을 했다. 불도저로 정지 작업을 한 다음 철조망을 둘러치고 감시 망루를 설치하고 그 안에 천막을 쳤다. 이렇게 해서 거제도의 들판이 온통 천막으로 덮인 것처럼 되었다.
막사는 처음에는 이런 천막들 뿐이었으나, 그 후 해가 지나면서 흙 벽돌로 담을 쌓고 난방이 됨으로써 겨울에도 추위를 면할 수 있게 되었다. 나중에 지은 막사들은 반영구적으로 되어서 포로수용소 시설로서는 불편한 점이 없을 정도였다.

또 이곳에는 3,000개의 침대를 보유한 제64야전병원과, 합계 2,500개의 침대를 가지고 있는 2개의 별관부속 병원(요양소)이 설치되었다. 또 바다를 통한 포로 및 물자의 양륙을 위해서 5개소의 LST 상륙부두가 있는 항구가 만들어졌다
  • 수용인원
고현지구에 시설된 포로수용소 전경,고현성이 훼손된 상태로 기단부만 남아있다.고현지구에 시설된 포로수용소 전경,고현성이 훼손된 상태로 기단부만 남아있다.
공사를 하는 것과 거의 동시에 부산에 있던 포로가 이곳으로 수송되기 시작하여서, 2월 말에는 이미 5만여 명의 포로가 옮겨졌다. 3월 1일에는 주요 본부 및 부대가 거제도로 이동되었으며, 나머지 인원의 이동도 계속되어 3월 말까지 거제도로 이송된 포로의 수 는 모두 약 10만명에 이르렀다.이 기간동안에도 원주, 영등포, 수원, 제천, 대전, 하양에 있는 포로수집소에서는 계속해서 부산으로 포로를 후송하였으며, 이 인원은 다시 거제도로 이송되었다. 그때까지 거제도로 수송되는 포로는 일일 약 2천명 정도였다. 그리하여 5월 말에는 11만 5천여 명이 이미 거제도로 수송되었고, 6월 말에는 포로 이송 작업이 거의 마무리가 되면서 거제도 포로수용소의 수용 인원수가 14만명을 넘어서게 되었다. 결국 부산에는 거제리 병원수용소만 남고 나머지 전 포로가 거제도로 이송되었다. 물론 그 후에도 전방에서 수집된 포로가 부산으로 모이고, 그 인원이 다시 거제도로 이송되는 과정은 계속되었다.포로수송작전에 있어서 이런 속도는 훌륭하다고 할 수 있었다. 그렇지만 이런 조급함 때문에 역대의 포로수용소장들이 비싼 대가를 지불하게 될 소지가 마련된 셈이었다.
갑자기 증가된 포로는 유엔군측이 조직적으로 처리할 수 있는 능력을 넘어설 정도가 되었다. 또한 수용소는 그 수용 가능량에 비추어 이미 만원이 되어버렸다.부산 포로수용소에 있던 포로의 대부분이 거제도로 옮겨지게 되자, 부산의 "제1포로수용소"라는 명칭도 거제도로 넘어오게 되었다. 이로써 부산의 포로수용소는 보조적인 위치로 바뀌게 된 반면, 거제도 포로수용소는 명실상부한 최대의 포로수용소가 되었다.포로수용소가 이전된 후로 계속되는 포로의 이송을 통해 거제도에는, 통계에 따라 다소의 차이는 있으나, 17만명에 이르는 전쟁포로들이 모이게 되었으며, 포로를 경비하는 부대병력과 행정인원 등이 합쳐져서, 자체 인구 약 10만명의 세배 이상이나 되는 사람으로 섬이 포화 상태가 된듯하였다. 이렇게 해서 다음 해인 1952년 포로의 분리·분산작전에 의해 이곳에 있던 대부분의 포로들을 다른 여러 수용소로 옮기게 될 때까지 약 1년 남짓 동안 거제도는 포로수용소의 주무대가 되었다.부산의 수용소가 거제도로 이동함에 따라 한국군 포로 경비대대도 같이 이동했다. 한국군 당국에서는 거제도의 3개 경비대대(31, 32, 33대대)를 통합하기위해 포로경비연대를 창설하고 그 본부를 거제군 고현리의 제32경비대대 내에 두었다.
  • 포로의 관리
    포로의 관리
  • 포로관리의 성격
고현지구에 포로수용소가 시설 되고 있는 초창기모습고현지구에 포로수용소가 시설 되고 있는 초창기모습
전쟁 전기간을 통하여 북한 및 중공군 포로에 대한 한국군 및 유엔군측의 관리 및 대우의 실태는 널리 알려져 있었다. 모든 수용소의 위치도 공개되어 있었다. 그곳에는 백색 또는 황색으로 PW표지가 되어 있어서 수용소 상공을 비행하는 항공기가 이 표지를 관측할 수 있게 되어 있었다. 공산군측의 포로 관리의 실상이 외부에 전혀 알려지지 않았던 사실과는 완전히 대비되는 현상이었다.

유엔군 관할하의 모든 포로수용소들은 1949년 제네바협약의 인도주의 원칙에 따라 엄격히 관리되고 있었으며, 그 실태가 국제적십자사 대표들에 의해 수시로 점검되고 있었다. 그리고 서방 언론들에 의해 언제든지 확인이 되고 지상을 통해 보도가 되었다. 전시라고 하는 악조건하에서도 유엔군측이 국제법 및 관례를 따라 포로를 관리하려고 노력한 것은 분명했다.
수용소의 질서는 포로자치제에 맡겨져 있었으므로 유엔군 수용소는 낙원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전장에서는 생각해볼 수도 없었던 숙사에서 하루 세끼의 식사를 제공받고, 하는 일이라고는 형식적인 작업이 고작이었다.

전장에서처럼 죽이고 죽는 전투도 없고, 발이 부르트도록 강행군을 하는 일도 없었으며 잠을 못자면서 경계근무를 설 필요도 없었다. 경비는 한국군과 유엔군이 든든하게 맡아 하고 있기 때문이었다. 더구나 겨울 추위가 와도 동상에 걸릴 염려가 없었다.포로수용소 내에서의 포로들의 일과는 통상 다음과 같았다.
  • 오전
    5시 30분
  • 오전
    6시 30분
    전원 집합
    점호
  • 오전
    7시
    오전 일과 시작
  • 오전
    11시 30분
    점심식사
  • 오후
    1시
    인원 집합,
    오후 일과
  • 오후
    4시
    일과 종료
  • 오후
    5시
    저녁 식사
  • 오후
    8시
    점호 후
    취침
  • 급식 및 피복
수많은 포로들의 급식을 위한 취사장수많은 포로들의 급식을 위한 취사장
전쟁 첫해 동안 유엔군은 병참상의 문제에 많은 어려움이 있었다. 여기에 전쟁 초반부터 수용능력을 넘는 포로를 보호 관리해야 하는 일은 대단히 큰 고민거리가 되었다. 먹이고, 재우고, 입히고, 보호하고, 안전을 지켜주어야 하는, 전적으로 의존적인 포로 집단의 존재는 그렇잖아도 압박을 받고 있는 유엔군의 병참문제에 더 큰 압박 요소가 되었다. 유엔군의 병참 물자의 조달, 보급은 미군이 담당하고 있었으므로 그것은 곧 미군의 고충이 되었던 것이다.유엔군 산하의 포로수용소를 관장하고 있던 미군 당국은 제네바협약을 최대한 준수하려 하였으며, 또한 국제적십자사 등의 확인을 받고 있었으므로 포로들의 관리에 대해 신경을 쓰지 않을 수 없었다. 1953년 2월 거제도 포로수용소에서는 매일 94톤의 쌀 및 다른 곡물이 소비되고 있었다. 세계적인 생산 감소에 의해서 쌀 정량이 감소되어도 쌀 대신에 다른 곡물이 보충되어서 식량의 전체 양은 줄어들지 않았다.
여기에 추가하여 많은 양의 물고기, 소고기국, 돼지국, 소금에 절인 쇠고기, 육고기와 야채류, 마른 계란이 지급되었다. 음식을 조리하기 위해서 포로들 중에서 요리사를 뽑아서 썼다. 그들은 또한 신선한 채소와 깡통에 든 채소, 말린 콩과 완두콩, 후추, 간장, 소금, 1일 10개피의 일제 담배가 든 레이션을 지급받았다.거제도 수용소 안에서는 공산 포로들에게 의복이나 일체의 공급품으로는 미제(美製)가 공급되었다. 먹는 것도 한국군의 수준에 따랐으나, 미제 레이션 등이 추가 지급되어 한국군보다 오히려 포로들이 더 잘 먹는다는 불평을 들었다. '자유'라는 담배가 특별 제조되어 이들에게 공급되었는데 국군용 '화랑' 담배보다 맛이나 질이 훨씬 좋았다. 대다수의 북한군 및 중공군 포로들은 일상 생활에서 그들이 일찍이 경험하지 못했던 훌륭한 식사 대접을 받고 있었던 것이 사실이었다.포로를 관리하는 미군 당국은, 이렇게 어렵사리 수용소에서 미국 음식을 먹여서 원기를 회복시켜 놓은 포로들이 연출하는 기상천외한 장면들을 목격할 줄은 전혀 예상하지 못했을 것이다. 아니 그렇게 될 줄 어렴풋이 알고도 달리 대책을 마련할 수 없었던 것이 그들의 속성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 작업 및 교육
    작업 및 교육
직업교육훈련인 양복장이 교육을 받고 있는 포로직업교육훈련인 양복장이 교육을 받고 있는 포로
유엔군사령부는 포로 처리의 방침을 그들의 노동력 활용과 심리전에 두었다. 노동이 가능한 포로들은 여러 종류의 작업에 투입되었는데, 그들이 하는 일은 주로 자기들이 쓸 물자의 운반과 도로 보수, 환경 작업 등 경노동에 속했다. 그 외에 수용소 내의 고정작업으로 환자 간호, 취사, 목공일, 청소 등이 있었다. 그리고 일과 속에 교양 강좌와 1인 1기의 실기 교육이 포함되어 희망에 따라 참석하도록 하였다. 장교, 환자 그리고 특별한 기술을 가지고 있는 사람은 작업에서 제외되었다.포로들 중에서 숙련되었거나 또는 반쯤 숙련된 기술자들은 제36공병단 감독하에 수용소 내에서 자신들의 생활 여건을 좋게 만드는 일을 하였다. 그래서 포로수용소 내에 있으리라고 상상하기 어려울 정도의 물건들도 버젓이 사용되고 있었다.

포로에 대한 교육은 유엔군사령부의 민간정보 교육국(民間情報敎育局 Civil formation& Education Section)의 주도로 이루어졌다. 포로 교육은 거제도수용소의 체제가 잡히기 시작한 1951년 6월에 반공적 성향이 강한 제63막사에서부터 시범적으로 실시되었으며, 시행 과정에서 발생한 문제점을 보완하여 다른 수용소로 점차 확대되었다. 교육 방법은 미군 장교가 민간인 교사들에게 교육 개요를 소개 하고, 실제 교육은 이들 민간인 강사들이 담당 했다. 포로교육의 주요 목표는 그들에게 기술을 훈련시키는 외에도 민주주의와 전체주의에 대한 사실을 가르쳐서 민주주의를 주입시키는 데에 있었다. 이러한 목표가 구체화된 교육 프로그램이 공식 오리엔테이션이었다.
대장장이 교육훈련중인 포로,이곳은 폭동시 사용할 수 있는 무기를 제조하기도 하였다.대장장이 교육훈련중인 포로,이곳은 폭동시 사용할 수 있는 무기를 제조하기도 하였다.
그 내용은 한국과 중국의 역사, 전쟁 발발 과정, 유엔의 목적·기능·실적, 전체주의에 대비한 민주주의의 원리·이상·관행, 자유 세계 여러나라의 발전상, 한국과 중국의 정치, 사회, 경제 문제 등이었다. 그 저변에는 자유 체제의 우월성과 전체주의의 문제점이 제시되었다. 당연한 일이겠지만 교육 이수 후의 평가에서도 반공적인 요소는 여실히 드러났다.교육의 분야에는 오리엔테이션 외에도 문자해득 수업, 직업 훈련, 보건 위생, 및 여가 활동 등이 있었다. 문자해득 수업은 포로의 상당수가 문맹(文盲)인 까닭에 다른 교육의 목표를 위해서도 강조되었는데, 포로들도 이를 유용하게 여겨서 수업에 적극 참여하였으며, 교육 효과도 가장 커서 오랫동안 실시되었다. 직업 훈련으로는 대장장이, 목수, 이발사, 구두수선, 양복장이 등의 기술교육이 이루어졌다. 1952년 초부터는 농업 교육이 실시되어 2만명 이상이 등록하기도 하였다. 그 외에 라디오 방송과 영화는 기본적으로 공식 오리엔테이션, 문자해득 수업, 직업 훈련, 보건 위생, 및 여가 활동 등의 다른 분야 교육에 도움이 되는 수단으로서 활용되었다.

영화는 매월 20∼30편씩 상영되어 4∼5만명이 관람했으므로 그 효과는 상당하였다. 라디오 방송은 영화보다 더 많은 사람, 특히 문자해독력이 낮은 사람에게도 전달이 용이하여 유용하게 활용되었다. 라디오 프로그램은 초기에 단지 뉴스와 음악이 방송되었지만, 점차 방송수신 장비를 갖추어 1951년 말에는 주당 21시간의 한국어 방송과 7시간의 중국어 방송이 가능해졌다.
민간정보 교육국 주관으로 실시되는 문맹자를 제외한 포로들을 대상으로 실시된 수업광경민간정보 교육국 주관으로 실시되는 문맹자를 제외한 포로들을 대상으로 실시된 수업광경
포로의 분산 작전을 전후하여 교육의 내용에 상당한 변화가 나타났다. 1952년 3월 말 모든 공개적인 반공적 선전 교재와 교육 과정은 폐지되었다. 교재와 그 내용이 소위 "긍정적 접근" 방법으로 바뀌었다. 포로들에게 민주 사회의 삶의 가치는 교육되었지만, 공산주의의 오류와 약점에 대한 언급은 피하도록 했다.북한이나 중국으로 돌아가기를 거부하는 송환거부포로들에 대한 교육은 그들의 자립 능력을 키우는 직업훈련과 석방후 생활에 적응할 능력을 키우는데 역점을 두었다. 이를 위해 초·중등학교 수준의 교육을 실시하고, 여가 시간의 불안을 줄이기 위해 신체 단련과 여가 활동, 지적 활동을 하게 하였다. 또한 포로에게 민주적 생활 방식에 익숙케 하고, 유엔과 미국에 대해 호의적인 태도, 공산주의에 대한 반대의 태도를 갖도록 교육에 친민주적·반공적 내용을 포함시켰다.

이런 교육에 대해서 포로의 반응은 어떠했는가. 수용소 당국은 잠재적으로 이념적 갈등을 내포한 포로들에게 공산측에 대한 심리전의 일환으로서 민주주의를 인식시키려는 뚜렷한 정치적 의도를 가지고 교육을 시작하였는데, 많은 포로들은 교육 프로그램이 그들의 마음을 친공에서 반공으로 바꾸는데 도움을 주었다고 말했다. 특히 오리엔테이션 교육은 좌익포로들의 사상을 약화시키면서, 아직 어느 쪽으로도 결정을 하지 못하고 중간적인 입장에 있는 포로들에게 공산측에 가담하는 것보다는 반공 진영에 참여하도록 설득하는 데에 기여하였다고 하였다.그렇지만 유엔군측의 교육에 대한 포로들의 저항과 공산군측의 대응도 결코 만만치 않았다.
거제도 수용소에서는 공산포로들의 저항에 의해 오리엔테이션 프로그램이 무시되거나 교육이 실시되지 못한 경우도 있었다. 그들은 수업이나 시험에서 자기의 생각을 밝히지 않거나 수업 내용을 비판하는 것으로 저항을 표시하였다. 또 라디오 방송용 유선과 스피커 장비를 파괴하거나 숨기기도 했다. 이러한 좌익포로의 저항에는 '해방동맹'이라는 조선노동당 거제지부의 뒷받침이 있었다. 포로 교육에 있어서 가장 큰 장애 요인으로 포로들의 장래 지위가 확정되지 않아서 수용소 내의 동요가 늘 존재한 것이었다. 좌익포로들로서는 교육에 공개적으로 협조하거나 반공의 뜻을 표현하는 것이 본국으로 송환된 후에 자신들의 입장에 치명적임을 알고 있었다.
방송 요원들이 방송 내용을 협의하고 있다. 주당 한국어 방송을 21시간, 중국어 방송을 7시간 정도 하였다방송 요원들이 방송 내용을 협의하고 있다. 주당 한국어 방송을 21시간, 중국어 방송을 7시간 정도 하였다
좌익포로들의 동요와 방해활동에도 불구하고 유엔군측은 친공막사에서 질서를 회복하는데는 교육 프로그램의 순조로운 재개가 필요하다는 입장을 고수하였다. 따라서 수용소 당국은 교육의 진행을 위해서 좌익포로를 다른 막사로 전출시켜 교육에 대한 방해 세력을 제거하는 방식으로 대처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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