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제 둔덕 출생인 청마(靑馬) 유치환은 시인이자 교육자로 활동하며 한국 문학계에 커다란 발자취를 남겼다.1931년 <문예월간> 에 <정적(靜寂)>을 발표하여 문단에오른 이후 40여년의 의욕적인 시작(詩作)생활을 통해 <청마시초(靑馬時秒)> 비롯한 13권의 시집과 3권의 수필집을 발간하였다. <깃발> <바위> <그리움> <행복> 등 많은 명작시들을 남긴 생명파 시인의 거목으로서 불굴의 생명 의지와 정열을 노래한 남성적 시인이었다.
양달석(梁達錫)
'소와 목동의 화가'로 널리 알려진 여산(黎山)양달석은 거제 사등에서 태어나 불우한 소년기를 거쳐 통영, 진주, 일본 동경 등지에서의 고학기간 중 화가의 길을 개척한 후, 부산에서 작품생활에 전념하였다. 주로 민족정서가 물씬 풍기는 목가적 풍경을 독특한 표현 기법으로 동화처럼 그려낸 서양화가로서 50여년에 걸쳐 수많은 미술전, 전람회 참여와 수상경력은 물론, 36회의 개인전을 개최하였으며 <사슴과 소녀> <농가> <목동> 등 2,600여 점의 걸작품을남겼다.
김기호(金琪鎬)
무원(蕪園) 김기호는 후세교육과 향토 발전에 한평생을 바쳤다. 고향인 거제 하청에 1941년 하청고등공민학교, 1951년 하청중학교, 1953년 하청고등학교를 설립하고 교장을 역임하면서 후진양성에 전력을 다하였다. 또한 1953년 <거제의 노래> 를 작사했으며 1955년과 1957년동아일보 문예 시조 부문에 <옹화부> 와 <청산곡> 이 당선되면서 시조시인으로 활동하게 되었고 1965년에는 주옥같은 글들을 담은 시조집 <풍란> 을 펴내는 등 거제의 문화창달에 크게 이바지하였다.
신용우(辛容禹)
소남 신용우는 죽순과 고구마의 할아버지라고 부를 만큼 농촌개발을 헌신적으로 이끈 선구자였다. 진주농업고등학교에서 새 영농법을 배워 고향인 거제 하청에 돌아와 경종의 다양화에 힘썼으며, 일본 산업시찰시 거제 기후에 적합한 맹종죽 세 그루를 가지고 귀국하여 두 그루의 생육과 재배에 성공하여 오늘날에는 하청면 일대의 야산을 푸른 대나무 숲으로 탈바꿈시켰으며 밤나무, 고구마, 포도 등의 품종개량과 재배확대를 통해 농촌의 자급자족 및 부흥에 앞장선 선도자였다.
윤택근(尹澤根)
거제 일운태생으로 본명은 윤택근이며 3.1운동,사회주의 청년운동을 이끈 거제지역 항일운동의 지도자였다.
초기 조선공산당 활동으로 민족해방투쟁에 나섰던항일혁명가이며 1930년 거제 하청 귀향 후 한의사로서많은 의료봉사를 하였다.
하동주(河東州)
고종 2년(1865) 거제면 동상리 진양하씨 하지호의 둘째 아들로 태어난 하동주는 영남의 서예대가로 진주에 나가서 명성을 떨치니 호를 성파(星坡)라 하였으며 1943년 세상을 떠날때까지 한결같이 추사(秋史) 김정희(金正喜)의 글씨체를 써왔다. 철종 2년 이조참판 김정희는 거제에 귀양와서 거제 반곡서원에 나다니면서 거제의 정훈성과 벗하고 서예를 전파하였는데 하동주는 하버지 하지호와 정훈성으로부터 전예서(篆?書)와 독창적인 추사체를 전수받았다. 어렸을 때부터 유달리 글씨 쓰는데 관심이 많았으며 아버지가 추사 김정희와 가까이 있으면서 추사체를 배웠고, 추사의 글씨가 담긴 책자를 가져와서 아들인 그에게 서법을 익히게 하면서 배우게 도움을 주었다.성파 하동주는 영남지역을 순방하면서 많은 글씨를 남겼다. 대표적으로 양산의 통도사, 고성의 옥천사, 부산의 범어사, 통영의 안정사, 용화사 그리고 진주의 촉석루, 밀양의 영남루에 걸어 놓은 큰 글씨의 현판 등이 있으며 이외에도 개인이 소유하고 있는 족자와 병풍 등이 있다.